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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장군묘

제 9길 진위고을길 원균 장군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한 장군 국가적 위기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원균장군의 업적과 역경 원균은 흔히 이순신을 모함하여 귀양을 보낸 간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균은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까지 오른 최고위급 장군이었습니다. 1540년 도일동에서 태어난 원균은 27세에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 했고 이후 여진족 토벌에서 공을 세우는 활약을 한 무관이었습니다. 1592년 경상우수사에 제수된지 3개월만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연합함대를 구축해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597년 칠천량(중) 13끗) 전투에서 일본수군의 기습포격에 크게 패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끝..

원릉군사우와 원주 원씨 임란 12공신 정문

원주 원씨 임란 12공신 정문원릉군사우原陵君祠宇소 재 지 : 도일동 산83, 84 배향위패 : 원균 조선 선조 때의 무관인 원균元均(1540~1597)을 모신 사당이다. 선무 일등 공신으로 책록 되면서 원균 묘(기념물 제57호)의 남쪽에 사당을 세웠고 300여 년이 지나 현재 위치로 옮겨진 후 1992년에 개축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전퇴를 두어 전면을 개방하고 양측면과 후면을 회벽으로 막아 감실형으로 구성한 조선시대 전형적인 사당 평면 형식이다. 정면 어간 중앙에는 ‘원릉군사우原陵君祠宇’라고 쓴 현판이 있다. 기둥은 치목한 부재를 이용해 약간 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사용했고 공포는 초익공으로 처리했다. 가구는 일고주 오량이며 3분 변작을 사용했다. 매년 음력 7월 15일에 제사를 지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