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삼남길 81

소사벌 그리고 소사원길 삼남길의 종착점

제 10길 소사원길 소사벌 싸움조선의 의지와 저력을 보여준 전투역사적으로 일본과 중국이 두 번 싸웠던 소사벌임진왜란과 청일전쟁, 소사벌에서 두 번 싸운 일본과 중국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공과 전쟁으로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특히 윤곽이 잡히지 않던 명나라와의 휴전논의가 실패하자, 일본군은 다시 조선을 침공하였습니다. 그 결과 육지의 일본군은 진주와 남원을 차례로 점령하였고, 해상에서도 조선 수군을 괴멸시키면서 북상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이에 대항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소사벌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의 맹렬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써 일본군의 북상은 저지되었습니다.400년후 일본과 청나라는 청일전쟁 때 소사벌에서 다시 격돌하였습니다. 청나라는 안성천 남쪽에 진을..

대동법시행기념비

제10길 소사원길 대동법 시행 기념비 조선의 세금체계를 바꾼 법 조선시대 농민을 보호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하려는 대동법 대동법 시행 기념비는 조선 효종 2년(1651)에 영의정 김육이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제안한 이후, 효종 10년에 이 법이 시행되었음을 기념하여 세워진 비입니다. 이 비는 삼남지방으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인 평택에 건립 되었습니다. 대동법은 조선 시대에 세금으로 납부하던 지방특산물 대신 쌀, 베 혹은 돈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납세제도 였습니다. 그전에는 부세 제도가 토지, 역, 공물로 구성되어 국가 경비를 조달했지만, 이중 공물이 국가수 입의 거의 60%를 차지하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에 따라 공납제와 방납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세금을 대신 납부하고 후에 지역에 가서 대가를 징수하는 ..

배다리생태공원

시민들의 힐링 명소이자 생태계 보고 ‘평택 배다리생태공원’ 도심 속 가족들 나들이 명소... 소중한 생물 다양성과 아름다운 자연경관 갖춰 평택시는 지난 5월 25일 배다리생태공원을 비롯한 소풍정원, 오성강변, 농업생태원, 원평나루갈대숲, 진위천유원지, 평택항, 평택호관광단지 등 평택8경을 선정했다. 이번호에 소개하는 배다리생태공원은 평택시 죽백동에 소재해 있으며, 도심에 있는 큰 규모의 공원으로 가족들 나들이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호에 보도된 소풍정원에 이어 앞으로 배다리생태공원을 비롯해 평택8경으로 선정된 오성강변, 농업생태원, 원평나루갈대숲, 진위천유원지, 평택항, 평택호관광단지를 차례로 소개한다. 평택시 죽백동 800번지 일원 소사벌택지지구에 소재한 배다리생태공원의 면적은 27만7,072㎡..

옥관자정과 갈원

옥관자정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왕(1623년 ~ 1649년)이 우물 맛을 보고 감탄해 옥관자를 내렸다고 하여 '옥관자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칠원동 새마을 가꾸기(운동)사업의 일환으로 1971년 시멘트 335포를 투입해 정비하였으며, 2022년 칠원소공원 조성사업으로 우물을 재조성하였다. ※ 옥관자 : 조선시대 당상관(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쓴 옥(표)으로 만든 망건의 관자.제 10길 소사원길 갈원관원들이 출장길에 묵은 휴식처 조선시대 출장관원들의 휴식과 숙박을 위한 편안한 쉼터 칠원동은 원래 갈원으로 불리다가 조선 말기에 칠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정부가 운영한 숙식 장소로서, 관원들이 출장이나 여행 중에 휴식을 취하고 숙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삼남대로는 그 당시 중요..

삼남길 제 10길 소사원길

소사원길(원균장군묘 ~ 안성천교)바른 정치의 이상이 담긴 대동법의 길! 소사원길은 칠원을 거쳐 경기도의 남쪽 끝까지 이어집니다. 새마을운동 모범마을로 선정되기도 했던 칠원에서는 물맛이 훌륭하다하여 인조임금이 벼슬을 내렸다는 옥관자정을 볼 수 있습니다. 평택의 자랑인 배꽃이 만발하는 들판을 지나면 대동법시행기념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대동법시행기념비에서 옛 소사원 자리와 미륵불을 지나면 소사벌을 거쳐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인 안성천교에 이르게 됩니다.

모선재와 진위고을길 끝점 그리고 소사원길 시작점

모선재慕先齋소 재 지 : 도일동 내리 배향위패 : 원주원씨 모선재는 원주원씨 문중의 제사준비를 하는 선영관리소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 건물과 솟을 대문인 모선문으로 구성돼 있고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주원씨 삼사좌윤공파는 도일동 신촌마을 내리저수지를 중심으로 원균묘(경기도 기념물 제57호)를 비롯해 그의 아버지 원준량元俊良·국량國良·임任등의 선영이 조성돼 있고 갓골을 중심으로 몽·연·사립·전·길상 등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모선재慕先齋 > 유적과 유물 | 평택시사 (pyeongtaek.go.kr)모선재慕先齋 > 유적과 유물 | 평택시사■ 모선재慕先齋 본문 소 재 지 : 도일동 내리​배향위패 : 원주원씨 모선재는 원주원씨 문중의 제사준비를 하는 선영관리소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 건물과 솟을..

원균장군묘

제 9길 진위고을길 원균 장군역사적 재평가가 필요한 장군 국가적 위기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원균장군의 업적과 역경 원균은 흔히 이순신을 모함하여 귀양을 보낸 간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균은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까지 오른 최고위급 장군이었습니다. 1540년 도일동에서 태어난 원균은 27세에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 했고 이후 여진족 토벌에서 공을 세우는 활약을 한 무관이었습니다. 1592년 경상우수사에 제수된지 3개월만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연합함대를 구축해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597년 칠천량(중) 13끗) 전투에서 일본수군의 기습포격에 크게 패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이 끝..

원릉군사우와 원주 원씨 임란 12공신 정문

원주 원씨 임란 12공신 정문원릉군사우原陵君祠宇소 재 지 : 도일동 산83, 84 배향위패 : 원균 조선 선조 때의 무관인 원균元均(1540~1597)을 모신 사당이다. 선무 일등 공신으로 책록 되면서 원균 묘(기념물 제57호)의 남쪽에 사당을 세웠고 300여 년이 지나 현재 위치로 옮겨진 후 1992년에 개축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전퇴를 두어 전면을 개방하고 양측면과 후면을 회벽으로 막아 감실형으로 구성한 조선시대 전형적인 사당 평면 형식이다. 정면 어간 중앙에는 ‘원릉군사우原陵君祠宇’라고 쓴 현판이 있다. 기둥은 치목한 부재를 이용해 약간 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사용했고 공포는 초익공으로 처리했다. 가구는 일고주 오량이며 3분 변작을 사용했다. 매년 음력 7월 15일에 제사를 지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