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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길 망우왕숙길 (망우역사문화공원 입구 ~ 근심 먹는 우체통)

망우역사문화공원은조선시대 ‘망우리’(忘憂里) 지명의 유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현재의 건원릉 자리를 친히 답사하고 무학대사의 권유로 이곳을 자신의 능지(陵地)로 결정하였다. 기쁜 마음으로 환궁하던 중 지금의 망우리 고개에 올라 ‘내가 이 땅을 얻었으니, 근심을 잊을 수 있겠다.’라고 경탄한데서 ‘망우리’(忘憂里)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 이러한 지명유래는 「숙종실록」, 「승정원일기」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1912~1932 일제강점기, 화장장과 공동묘지의 등장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장례문화는 땅에 시신을 묻는 매장문화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일제가 정한 공동묘지 외에는 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공동묘지 조성을 위해 경성부는 1920년대 전후로 서울의 동서남북(신당리, 아현리, 이태원,..

제1길 망우왕숙길 (망우리역사문화공원역 ~ 딸기원)

버스 타고 망우리 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내리면 '구리 ↔ 서울 경계석'을 지나야 망우왕숙길 시작점인 딸기원에 갈 수 있어요. 평해길 처음 곳이자 망우왕숙길 처음 곳인 딸기원에 도착하면 경기옛길 평해길 안내판과 왕우왕숙길 안내판을 볼 수 있습니다.제1길 망우왕숙길 딸기원 이야기딸기원마을은 구리시 교문1동에 속해 있는 자연마을입니다.서울에서 망우리고개를 넘으면 첫 번째로 마주치는 마을이지요. 옛날 평해로로 고개를 오가던 시절 이곳에는 주막집들이 있었답니다. 지금이야 경춘로라는 넓은 도로가 생기며 고개를 넘기가 쉬워졌지만 옛날에는 걸어다기기에 상당히 가파른 고개여서 고개를 넘어온 사람이나 넘어갈 사람이나 모두 이 마을에 있던 주막에서 쉬었다 가고는 했지요.원래의 마을 이름은 '응골'이라 불렀는데 집도 몇 채 없..

제1길 망우왕숙길(딸기원 ~ 미음나루)

한양에서 관동으로 가는 시작의 길125㎞ 평해길 대장정의 시작인 망우왕숙길은 평해길 노선 중 서울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첫 관문입니다. 마음의 근심을 잊는다는 의미를 가진 망우산은 수많은 역사적 위인의 묘소와 마주할 수 있는 역사교육의 공간입니다. 구리전통시장은 볼거리, 먹거리, 살거리 등 오감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곳이며, 그중 인근에 위치한 돌다리곱창골목은 저렴한 가격과 전통적인 맛으로 숨겨진 명소 중의 하나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돌아오는 길에 여덟 밤을 유숙한 곳이라 전하는 왕숙천을 걸으며, 평해길의 매력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소요시간2시간 40분(8.8km)경로; 딸기원 → 구리시청 → 구리전통시장 → 구리역 → 미음나루 → 합수머리세월교스탬프 망우고개 : 망우산 등산로 초입(서울..

평해길 - 단종이 유배를 가며 걷던 길, 신사임당과 율곡이 오간 길

단종이 유배를 가며 걷던 길, 신사임당과 율곡이 오간 길01한양에서 관동으로 가는 시작의 길02수려한 한강풍경과 어우러진 인문지성의 길03마음으로 즐기는 아름다운 경관, 상심낙사(賞心樂事)의 길04두 강이 만나 하나가 됨을 느끼는 치유의 길05청정자연의 설렘을 느낄 수 있는 치유의 길06시간이 머무른 계절의 정취가 시작되는 낭만의 길07민족의 흔적과 마주하는 역사의 길08함께 하고 싶은 이와 떠나는 특별한 여정, 동행의 길09옛사랑의 추억과 폐철로를 걷는 낯선 경험의 길10내 안의 길을 찾는 명상의 길

서울 한복판에서 만나는 시간 여행, 남산골한옥마을

서울 남산 아래 자리한 남산골한옥마을, 이곳은 도심 속에서 조선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재현한 특별한 공간이다. 바쁜 도시의 흐름 속에서도 한옥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장소다. 남산, 그리고 한옥마을의 탄생남산은 원래 ‘목멱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아름다운 자연경관 덕분에 선비들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남산골한옥마을은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전통 한옥 다섯 채를 이전·복원해 조선 시대 양반가의 생활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이다. 정원에는 서울의 자연식생을 살려 전통 수종을 심고, 계곡을 만들어 물이 흐르도록 했다. 고풍스러운 정자와 연못도 함께 복원되어 한옥마을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든다. 조선 시대..

경복궁 향원정 (景福宮 香遠亭)

서울 한복판, 화려한 도심을 벗어나면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경복궁 후원 속에 자리한 향원정이 그 주인공이다. 이곳은 단순한 정자가 아닌 조선 왕실의 역사가 스며 있는 공간이자, 자연과 건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조선 왕실의 쉼터, 향원정향원정은 고종 시대에 조성된 육각형 정자로, 아름다운 연못 향원지 속 작은 섬에 자리하고 있다. ‘향원이 멀리 퍼진다’는 뜻을 지닌 향원지의 이름처럼, 이곳은 왕실이 휴식을 취하며 자연과 함께 숨 쉬던 공간이었다. 푸른 연꽃이 만개하는 여름이면 이곳의 운치는 더욱 배가된다.🌉 복원된 시간의 흔적, 취향교향원정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 중 하나는 취향교다. 본래 6·25 전쟁으로 사라졌던 목교(나무 다리)는 202..

추존왕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의 능, 김포 장릉

김포 장릉은 왕으로 추존된 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으로, 쌍릉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장릉은 처음에는 ‘원(園)’의 형태로 조성되었다가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능으로 격상되었습니다. 원종은 조선 14대 왕 선조의 아들이며, 16대 왕 인조의 아버지였죠. 원종은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인조가 즉위한 후 대원군으로 봉해졌고, 1632년(인조 10년)에 왕으로 추존되었습니다.원종과 인헌왕후의 이야기- 원종(1580~1619)은 선조의 셋째 아들로, 임진왜란 때 아버지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에 책록됨.- 광해군 시대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죄로 죽자, 충격으로 병을 얻어 40세에 세상을 떠남.- 아들 인조가 즉위 후 왕으로 추존하면서 정통성 문제를 정리.- 인헌왕후 구씨(1578~1626)는 능..

청동기 시대의 비밀을 간직한 강화 고인돌 유적

고인돌은 선사 시대의 거대한 석조 유물로, 과거의 삶과 문화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특히 동아시아 지역, 그리고 한반도에서 그 밀집도가 높습니다.놀랍게도 우리나라에는 약 4만 기 이상의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세계 전체 고인돌 수의 절반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강화도에는 약 70여 기의 고인돌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 중 하나가 바로 강화 부근리 지석묘입니다.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탁자식과 바둑판식으로 나뉘는데, 북쪽 지역에서는 주로 탁자식, 남쪽 지역에서는 바둑판식이 발견됩니다. 부근리 지석묘는 높이가 2.6m, 덮개돌의 길이가 6.5m에 달하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탁자식 고인돌로 꼽힙니다. 50톤에 달하는 거대한 덮개돌이 두 개..

사당을 바라보는 종묘 망묘루

망묘루는 종묘 안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공간이에요. 이름부터가 ‘망묘(望廟)’—즉, 사당을 바라본다는 뜻을 담고 있죠. 조선시대 임금이 종묘제례를 앞두고 머물며 선왕을 추모하고 나라를 생각하던 곳이라니, 그 분위기만으로도 역사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이곳은 정면 7칸, 옆면 2칸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 중 두 칸은 누마루로 되어 있어요. 누마루는 마루보다 높게 만들어진 공간으로, 주변 경관을 더욱 잘 조망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에요. 특히 망묘루는 종묘의 다른 건물들과 달리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끕니다. 망묘루 앞에는 세종 25년(1443년)에 조성된 연못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연못 중앙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어요. 궁궐에서는 보통 소나무를 심지만, 종묘는..

종묘 영지, 신령한 연못

종묘에는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특별한 연못이 있습니다. 바로 영지(靈池)입니다. 오늘은 이 고즈넉한 연못의 이름과 유래, 역사 그리고 그 의미를 친근한 시선으로 풀어보려 해요.영지, 신령한 연못종묘를 방문하면 넓은 정원 속 조용히 자리한 연못이 눈길을 끕니다. 이곳이 바로 영지예요. '영(靈)'은 신령스럽다는 뜻이고, '지(池)'는 연못을 의미하니, 이름 그대로 영적인 기운을 품고 있는 신성한 장소라 할 수 있죠.유래와 역사영지는 단순한 연못이 아닙니다.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를 기리는 종묘의 일부로서, 제례를 위한 신성한 공간이었어요. 이곳에서 신들이 깃들고 조상들과 교감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단순한 경관의 역할을 넘어 종묘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죠.특히 영지는 제례 시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