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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창포원

붓꽃이 가득한 특수 식물원이자 생태공원으로 지정된 ‘서울창포원’서울 강북의 끝자락인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에 세계 4대 꽃 중 하나로 꼽히는 붓꽃이 가득한 특수 식물원이자 생태공원으로 지정된 서울창포원은 51,146m²에 붓꽃원, 약용식물원, 습지원 등 12개 테마로 구분 조성되었습니다. 붓꽃원에는 노랑꽃창포, 부처 붓꽃, 타레붓꽃, 범부채 등 '붓'모양의 꽃봉오리로 된 붓꽃류 130여 종의 다양한 붓꽃 30만 본을 심어 붓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약용식물원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용식물의 대부분을 한자리에서 관찰할 수 있으며, 습지원에서는 각종 수생식물과 습지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도록 관찰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초화원에는 꽃 나리, 튤립 등 화려한 꽃들이 계절별로 피어납니다.서울..

봉서산

제4길 파주고을길 봉서산 이야기다양한 역사와 전설로 가득한 산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주둔했던 군사적 요충지 봉서산은 대한민국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에 위치한 산으로, 역사와 전설로 유명한 장소입니다. 이곳은 봉황이 노래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양한 전설과 역사적 사건들이 얽혀 있는 곳으로 군사적 중요성도 갖고 있습니다. 봉서산의 정상에는 두개의 우물이 있는데, 하나는 "장사우물"이고 다른 하나는 "전대우물'어라고 합니다. 장사우물은 장사라는 인물이 먹었다는 전설이 남아있으며, 전대우물은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믿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들은 봉서산에 대한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봉서산에는 장사가 노는 모습을 상징하는 "공기바위"라는 바위도 있습..

파주향교

파주향교 대성전 坡州鄕校 大成殿경기도문화재자료 제83호 파주향교의 연혁에 대하여는 관련 기록이 남은 것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은 3가지 설이 구전해 온다. 첫째, 1398년(태조7)에 서원산瑞原山 아래에 창건하였고 그 후 1414년(태종14)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둘째, 1304년(고려 충렬왕30) 봉서산鳳棲山 아래에 건립하여 대성당大成堂이라 불리던 것을 세종 재위 시(1418~1450)에 중건하고 대성전이라 개칭하였다고 전하나 확실치 않다. 셋째, 1456년(세조2)에 창건하고 1660년(현종원)에 사액을 받아 돈암서원遯巖書院이라 하였고 1880년(고종17)에 수해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도 한다. 파주향교는 전체적으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파주시 부곡리

제4길 파주고을길 거지무덤 와복형국의 명당자리자자손손 잘 살게 된 소금장사 거지, 조선행이 죽어 묻힌 명당 1970년대 금촌 아동리(안산동) 부락에는 연자방앗간이 있어 수십 명의 거지들이 정작하며 살았는데, 이곳에 어린 자식 둘을 데리고 소금장사를 하는 조선행이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1971년 4월 봄날 광탄면 발랑리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소금을 팔고 돌아가던 조선행은 백경수가 흘러내리는 길목, 현재 부곡 3리, 산기슭에 지게를 버티어 놓고 주저앉아 쉬다가 쓰러져 잠이 든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거지 수십명이 달려와 죽은 그 자리에 장례를 지내주었는데, 그곳이 명당이었다는 것입니다. 후에 조선행의 자식은 인천에서 소금장사를 하여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손들..

의주길 제 4길 파주고을길

의주길 제 4길 파주고을길 (신산5리 ~ 선유삼거리)옛 파주 관아를 지나 걷는 숲길 파주고을길은 옛 파주목의 중심이었던 파주읍을 지나는 숲길, 농로길입니다. 옛 의주대로는 지금의 78번 도로를 따라 줄곧 이어지지만 아쉽게도 도보여행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의주길은 지금처럼 숲길을 따라 잇게 되었습니다. 파주고을길에서는 파주관아터를 지나며, 파주향교를 만날 수 있어서 옛날 이 지역이 누렸던 영화를 짐작케 합니다.

소사벌 그리고 소사원길 삼남길의 종착점

제 10길 소사원길 소사벌 싸움조선의 의지와 저력을 보여준 전투역사적으로 일본과 중국이 두 번 싸웠던 소사벌임진왜란과 청일전쟁, 소사벌에서 두 번 싸운 일본과 중국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일본의 침공과 전쟁으로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특히 윤곽이 잡히지 않던 명나라와의 휴전논의가 실패하자, 일본군은 다시 조선을 침공하였습니다. 그 결과 육지의 일본군은 진주와 남원을 차례로 점령하였고, 해상에서도 조선 수군을 괴멸시키면서 북상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은 이에 대항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소사벌 전투에서 일본군은 조명연합군의 맹렬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써 일본군의 북상은 저지되었습니다.400년후 일본과 청나라는 청일전쟁 때 소사벌에서 다시 격돌하였습니다. 청나라는 안성천 남쪽에 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