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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평해길

제2길 미음나루길(수석리 토성 ~ 조말생~ 석실마을)

by 나들나들 2025. 8. 16.

수석리 토성 (水石里 土城)


수석리 토성은 통일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흙으로 쌓아 만든 군사 유적이다. 

수척리 토성은 흙을 모아서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예로부터 주민들이 '토미재' 혹은 '퇴미재'라고 불러왔다. 

성 둘레는 140~150m 정도로 비교적 작은 방어 시설이며, 한강의 조운 시설을 부호하기 위하여 쌓아 만든 보루 유적으로 보인다.
이 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1.5km 영내에 안산 보루(남양주 다산동), 역촌토성(남양주 삼매동) 등 규모와 성격이 유사한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다.

수석리 토성 水石里 土城
경기도 기념물
수석리 토성은 통일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흙으로 쌓아 만든 군사 유적이다.
수석리 토성은 서쪽으로 아차산(峨嵯山, 구리), 남쪽으로 이성산(二聖山, 하남)이 보이며, 앞에 한강의 미음 나루가 있어 예부터 교통에 있어 중요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유적을 중심으로 반경 1.5km 이내에 안산보루(남양주 다산동), 역촌 토성(남양주 삼패동) 등 규모와 성격이 유사한 유적들이 한강의 미음 나루를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있어서 한강의 조운 시설*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아 만든 보루 유적으로 보인다.
'보루'는 땅의 생긴 모양이나 상태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쌓아 만들어진 둘레 300m 이내의 비교적 작은 방어 시설이다. 

수석리 토성은 구릉 정상부의 높은 땅을 깎아 평탄하게 만들고 경사진 부분은 흙을 쌓아 네모꼴의 높은 땅으로 만들었다. 

흙을 모아서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주민들이 '토미재' 혹은 '퇴미재'라고 불러왔다.
출토 유물로는 2008년에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토기편과 고려시대 토기 및 기와편이 있다.
* 조운 시설: 현물로 받아들인 각 지방의 조세를 서울까지 운반하는 시설

Earthen Fortification of Suseokri
This earthen fortification was constructed by cutting and flattening the top of a hill and filling the inclined adjacent area with soil to create a rectangular area of elevated land. 

It is presumed to have been built to prevent enemy invasion around the turn of the Unified Silla (668-935) and Goryeo (918-1392) periods.
It is also locally known as Tomijae or Toemijae, both meaning "Hill of Piled Soil."
This fortification commands a view of Achasan Mountain in Guri to the west and Iseongsan Mountain in Hanam to the south.

The fortification has long been regarded as an important transportation point, as Mieumnaru Dock of the Hangang River
is located in front of it. Other defensive structures surrounding Mieumnaru Dock are distributed within a 1.5 km radius of this fortification, such as Ansanboru Fortress in Dasan-dong and Yeokchontoseong Earthen Fortification in Sampae-dong. 

During the Joseon period (1392-1910), tax was collected in the form of grains and local products, and these items collected from each region were transported to the capital through the Hangang River. 

Therefore, this fortification in Suseokri is presumed to have been used to protect the river's transportation facilities.
Through an excavation of this site in 2008, earthenware fragments dating to the Unified Silla period and earthenware and roof tile fragments dating to the Goryeo period were unearthed.


조선초기의 충신 조말생 이야기


조말생은 1401년에 과거에 응시해 장원급제를 한 이후로 태종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 왕의 곁에서 나랏일을 돌보았던 인물입니다.
특히나 태종의 파벌이었던 조말생은 세종의 정치적인 스승이었으며. 두 부자(父子) 사이를 조율하고 상황을 주시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실하게 지켜낸 현명하고도 능수능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뇌물수수로 인해 재산을 축적했다가 결국 귀양을 가게 되는 모습에서는 조말생이 그저 어질고 현명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수형에 해당되는 그 죄 값을 많은 신하들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그저 귀양을 가게끔 한 세종의 결정은 조말생이 나라와 조정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 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결국 조말생은 세종에 의해 다시 관직으로 불려나와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승진하면서 관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점차 나이가 들고, 몸이 허약해서 세종에게 몇 차례에 걸쳐 사직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세종은 조말생 만한 인물여 없다는 이유로 조말생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보면 세종도 조말생의 정치적인 견해와 영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2길 미음나루길 석실마을


지성문화의 다양성이 집약된 석실서원

석실서원은 조선 후기의 수많은 서원 가운데 정치적 ·사상학문적으로 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서원이었습니다. 

서원은 덕성함양과 수기(己)를 위해 인적이 드문 한적한 심산유곡이나 물가에 많이 세워졌습니다.

특히, 석실서원은 그 중에서 강산풍경이 한강 위에서 풍광이 가장 수려하여 수많은 문인이 극찬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석설서원은 북벌론의 이념적 표상으로 추앙되었던 김상헌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으로, 이후 김상용, 김수항,민정중, 이단상,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감원행, 김이안, 김조순이 배향되었습니다. 

1656년(효종 7) 당대 조정의 명사들과 사림의 발의로 창건된 석실서원은 사림의 강학(講學)과 장수(藏修)라는 서원 본래의 기능뿐만 아니라 사림정치 아래 붕당정국이 변전하는 속에서 정치적 ·사상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유수한 서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서인계서원으로, 이어 노, 소론 분당 후에는 노론계, 그리고 노론 내에서 인물성(人物性) 논쟁으로 호론(湖論) · 낙론(各論)이 갈릴 때는 낙론의 진원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후기 사대부문화의 큰 특색인 진경문화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지금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철폐된 후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조선시대 지성인들의 요람이자 활동지였던 이곳에서 마음의 눈을 통해 '인문지성의 길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