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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북리 석불입상 및 석탑

나들나들 2024. 9. 14. 06:13


마북리 석불입상 및 석탑

용인시 향토유산

석불입상은 현재 용화전이라는 전각 속에 봉안되어 있다. 전각 바로 좌측면에는 남아있는 부재를 모아 건립한 탑 1기가 있고, 그 앞에는 2열로 선정비들이 늘어서 있다. 탑재는 파탑이 되어 쓰러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세운 것으로 쌓아놓은 석재 중에 다른 석재가 포함된 것으로 생각된다. 앙련이 조각된 1층 옥개석 위에 얹혀져 있는 방형 석재는 대좌형 기단의 상대석으로 보이는데 이상대석의 뒷면에 치석된 옥신과임의 폭이 1층 옥신의 폭보다 좁아 같은 석조물의 부재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용화전은 좌우 각 한 칸의 건물에 전면을 제외한 삼면은 자연석을 이용한 방화담이 설치되어 있고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이곳은 현의 치소가 있던 마을의 어구이며 터가 드센 곳이여서 터의 기를 누르기 위해 축귀장신의 일종이던 것을 후대 사람들이 이를 미륵으로 신앙하며 당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 미륵석상은 조형상 장승이나 묘지의 문인석을 방불케 하는 유물로서 보는 이의 견해에 따라서는 장승의 일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 석상이 있는 터에 석탑재가 남아 있고 예부터 이곳을 용화전이라고 지칭해 온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비록 생긴 모양은 장승을 닮긴 했으나 미륵으로 섬겨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문화재총람에는 이 석상의 조성시기를 조선시대 후기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좀 더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왜냐하면 조선조 후기에 이런 불상을 조성한 예가 드문 반면 외사면 가창리 미륵상에서와 같이 크기나 치졸성에 있어서 비슷한 점이 있고 높은 이마나 어깨까지 내려앉은 귀의 모양 등에서 유사점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석인상, 장승 등 불상이 아닌 조각상을 미륵으로 예배 치성하는 경향은 임진왜란 이후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 불상은 직육면체의 몸통에 높은 관을 쓰고 있다. 얼굴은 장방형으로 턱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널리 유행하는 마을 미륵신앙의 일종으로 민간에게 치병, 기자, 마을의 수호, 기복 등의 역할을 하며 신앙되었던 불상으로 여겨진다. 상의 전체 높이 211.5cm, 머리높이 71.5cm, 어깨쪽 51cm, 최대측면 두께는 52cm이다.

 

배치도

현 용화전 뜰에는 중앙의 당를 중심으로 좌우에 비석들이 한줄씩 배열되어 있다. 이곳은 옛 용인현의 관문이고 한양으로 통하는 대로변이었다. 앞의 길과 평행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도로 정비 등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비는 모두 14기이다. 이 중 현령 등의 송덕비가 10기, 군수 선정비 1기, 효자비 1기이고 나머지는 용인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김홍집과 민영준 등 구한말 인물의 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본래 이곳 용화전에는 고려시대 '획주사' 라고 하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1.효자 한량 김해 김사철지리

비석의 전면은 "본관이 김해이고 신분이 한량인 효자 김사철의 마을" 이란 의미이며, 아마도 어느 마을의 입구에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비는 임오년 3월에 건립되었다고 적혀 있지만 김사철의 생몰년을 알 수 없어 임오년이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2.현병 유공봉휘 청덕애민선정비

유봉휘는 숙종 29년 8월부터 숙종 31년 2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숙종 31년 11월에 건립되었다.

박용민은 고종 4년 2월부터 고종 6년 9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6년10 3월에 건립되었다.

3.행 현령 박후용민 청간선정비

박용민은 고종 4년 2월부터 고종 6년 9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6년 3월에 건립되었다. 고종 4년 6월 15일 경기감사가 올린 장계에 의하면 "용인현령 박용민은 창고의 곡식을 썩히지 않고 잘 간수하여 궁핍한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구제되었으니 상께서 서류를 열어 살펴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4.행 현령 최공석두 영세불망비


최석두는 고종 22년 12월부터 고종 24년 10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25년 4월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마음을 가지기를 깨끗하고 검소하게 하며, 송사를 판단하기를 강직하여 굴하지 아니하였고, 녹봉을 덜어내기를 어렵지 않게 여겨 한결같았으며, 감영에 보고하기를 제물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이 하였다"고 한다.


5.선혜당상 민공영준 영세불망비

민영준은 고종 30년째에 내무부 독판을 비롯해 선혜청 당상관 등을 검직하였고, 이 비는 고종 30년 2월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보좌함이 나라에 도움이 있게 하였고, 이득이 백성에게 미치도록 하였다" 고 한다.

6.현령 김공이중 애민선정비


김이중은 정조 6년 8월부터 정조 7년 6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정조 10년 9월에 건립되었다.

7.행 현령 박공응종 영세불비

박응종은 고종 20년 5월부터 고종 20년 12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12년 6월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나라에 내야 할 많은 돈과 곡식을 탕감해 주어 많은 굶주린 백성들을 구하였다"고 한다.

8.관찰사 김홍집 영세불망비

김홍집은 고종 19년 10월부터 고종 20년 7월까지 경기도 관찰사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21년 6월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마음을 다잡기를 지극히 공평하게 하고, 정치를 행하기를 어짊으로 하였다"고 한다.

9.현령 서공명균 청덕애민선정비


서명균은 숙종 42년 11월부터 숙종 43년 7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경종 원년 5월에 건립되었다.

10.행 군수 김후영한 애민선정비

김영한은 고종 광무 5년 9월부터 고종 광무 6년 1월까지 용인군수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광무 7년 2월에 건립되었다 .

11.현령 심공존지 휼민선정비

심존지는 순조 19년 9월부터 순조 20년 2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순조 21년 12월에 건립되었다.

12.현령 이후원일 청덕선정비

이원일은 현종 15년 8월부터 철종 4년 6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철종 2년 12월에 건립되었다.

13.현령 홍후현보 선정비

홍현보는 고종 12년 12월부터 고종 16년 3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고종 16년 2월에 건립되었다.

14.행 현령 윤공태국 청간선정비

윤태국은 정조 3년 7월부터 정조 6년 7월까지 용인현령으로 재임하였고, 이 비는 정조 10년 2월에 건립되었다.



마북리 석불입상 - 디지털용인문화대전 (grandcultur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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