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선생 묘
경기도 기념물 18호
용인시 기홍구 마복동 347 구성초등학교 뒤편
이곳은 을사늑약에 거해 자결한 총정공 민영한 (1851~1905)선생이 안장된 묘역이다.
그는 당시 최고 세도가였던 여흥 민씨척족의 일원으로 187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해 도승지 형조판서 한성부운 등 요직을 맡았다. 이후 1897년 특명전권공사로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는데, 이때 당시 여러 열강을 방문해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를 위해 독립협회를 후원하며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지만 친일세력에 의해 파직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에 의해 실패하고, 등포와 각국 공사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망국의 책임을 안고 자결한 충정공의 죽음에 고종부터 걸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애통해했다고 전해진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묘소 우측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로 쓰인 묘비가 있다.
민영환 선생 묘
경기도 기념물 제 18호
민영환 선생 묘는 대한제국기 문신인 민영환(1861~1905)의 묘소이다.
민영환은 187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특히 외교관으로서 서양의 여러 국가들을 방문하여 근대적인 문물제도를 배웠다. 이후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하면서 개혁을 시도하였고, 일본의 제국주의와 내정 간섭을 비판하였다.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늑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가자, 민영환은 이 조약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에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자택에서 자결하였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와 각국의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겼으며, 그의 죽음은 국민의 항일 의식을 북돋고 의병 운동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민영환의 묘는 원래 수지구 풍덕천동에 있었으나, 1942년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부인과 합장하였다. 봉분 뒤쪽에 높은 언덕을 쌓고 그 위에 담을 설치한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봉분 앞에 석물(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로는 상석(무덤 앞에 제품을 차려 놓기 위하여 넓적한 들로 만들어 놓은 상)과 향로석(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들)이 놓여 있고, 좌우로 문인석(능 앞에 세우는 문관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과 망주석(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방의 돌기둥)이 각각 한 쌍씩 배열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장명등(무덤 앞이나 전 안에 돌로 만들어 새우는 등)이 있다. 상석 오른쪽에는 1959년에 건립한 묘비가 있는데 앞면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썼다.
민영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민영환(閔泳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죽어도 죽지 않는다"…민영환이 남긴 유서, 등록문화재 된다 | 연합뉴스 (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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