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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성산 봉수터 건물지

용인 석성산 봉수터 건물지경기도 기념품 제227호 유적 성격 : 조선시대 봉수시설 관련 건물지 용인 석성산 건물지는 2019년 5월~2020년 4월까지 총 3차례의 시굴 및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에 축조한 축대 2개소와 건물지 4동, 우물지 2기가 확인되었습니다. 축대는 2개소가 확인되었으며, 모두 2단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조성 방법은 자연암반면에 할석(자연돌을 적당히 가공하여 만든)을 기대어 쌓았으며, 바른층 '품' 자형 쌓기, 들여쌓기를 사용하였습니다. 건물지는 총 4동이 조사되었으며, 1 • 4호 건물지는 초석과 구들(온돌)시설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습니다. 축대를 쌓아 평탄지를 조성한 후 그 위에 건물지를 조성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건물지에서 출토된 기와와 자기의 제작..

석성산 봉수유적

제2로 직봉 - 용인 석성산 봉수 유적봉수는 국경지대에서 발생한 외적의 침입사실을 중앙 정부에 알리는 데 활용한 통신 제도이다. 서울로 향하는 주요 산봉우리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불과 연기로 신호를 보내 국경의 위급 상황을 알렸다.용인 석성산 봉수는 해발 471m의 석성산 정상에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제2로 직봉의 하나이다. 조선 후기 봉수망을 알 수 있는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는 5개의 직봉* 노선을 운영했는데. 용인 석성산 봉수는 제2로 직봉 노선에 해당한다. 제2로 직봉 노선은 부산 다대포진 응봉 봉수에서 시작하는 노선으로 총 44대의 봉수대가 속해 있다. 이 노선은 삼남 지방의 봉수 신호가 처음 들어오는 안성 망이산 봉수를 지나 용인 건지산 봉수(원삼면 소재) 용인 석성산 봉수 성남 천림..

용인 석성산성/보개산성

용인 석성산성석성산 정상과 능선을 둘러서 남아 있는 용인 석성산성은 보개산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둘레 길이 약 2km로 석재를 사용하여 쌓은 석축산성입니다. 산성의 축조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문헌에 따르면 석성산성은 15세기 초기까지 사용하다가 15세기 중엽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동안에 고쳐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 용인 석성산성 북벽은 2023년 4월에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잔존하고 있던 성벽의 형태가 파악되었습니다. 성벽은 최대한 자연지형을 활용하였으며, 일부 경사가 급한 곳은 자연 암반을 성벽으로 이용하였습니다.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기와편 등의 유물이 출토 되었습니다. 용인시에서는 용인 식성산성의 종합정비계획을 ..

한솔공원 지나 해놀공원

용인시, 동백지구 도는 6.8km 순환형 산책로 조성 - 용인뉴스 (yonginnews.net) 용인시, 동백지구 도는 6.8km 순환형 산책로 조성 - 용인뉴스용인시는 기흥구 동백호수공원을 중심으로 기존 근린·어린이 공원 10곳과 석성산 숲길을 연결해 동백지구를 전체적으로 도는 6.8kmdml 순환형 ...www.yonginnews.net 용인 중동 석곽묘 節仁 中间石椰效 삼국시대(5~6세기) 용인시 기흥구 중동 131-30 깬돌 또는 냇돌과 판돌을 섞어 쌓은 무덤으로 ‘할석묘 ’ 또는 '석곽묘' 라고도 한다. 돌널무덤의 하나로 분류하기도 하며 청동기시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나타나는 무덤의 형식이다. 용인 중동 석곽묘는 동백도서관에서 석성산 방향의 등산로를 따라 약 600m 정도 떨어진 해발 ..

영남길 제 4길 석성산길(동백호수공원 ~ 용인문화복지행정타운)

용인의 진산 석성산석성산(石城山)은 동백지구를 감싸고 있는 주산(主山)이자 용인문화복지행정타운까지 이어지는 용인의 진산(鎭山)입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부산 동래에서 시발된 내지봉수가 석성산을 거쳐 가기도 했으며 신라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산성(보개산성, 할미산성)이 있는 곳입니다. 석성산은 넓어진 용인시 행정구역의 중심지역에 위치하여 오늘날 용인 동서화합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영남길 제 3길 구성현길 끝 곳이자 제 4길 석성산길 첫 곳

제4길 석성산길 어정 임금님이 머무르신 곳 3번 바뀐 어정의 한자 표기 어정은 조선시대 이후로 유서깊은 지명입니다. 현재도 용인에서 오래 사신 주민들께서는 어정삼거리와 동백 지구를 묶어 어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곳입니다. 맨 처음 어정의 한자 표기는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수여선의 철도역 이름을 따 어정이라고 표기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1995년 일본식 지명을 정비하면서 지명위원회가 세종대왕께서 여주 행차시 용인을 거쳐 가며 물을 마셨다는 설에 근거해 임금이 마셨던 우물이 있던 곳이라는 의미가 적절하다고 판단해 ’어정‘으로 개정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21년 어정 주민들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성종 2년에 ‘대가’(임금의 가마 행렬)가 용인의 합천(신갈천, 현 어정역 인근)가에서 주정(낮 수라)하시며 머물렀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