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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 무망루 그리고 청량당

나들나들 2025. 6. 13. 11:56

수어장대

장대란 지위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격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있어 '서장대'라고 불렀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고, 수어청 우영장이 서장대에 머물며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후 영조 27년에 유수 이기진이 복층으로 중건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의 수어장대 현판은 현종 2년에 유수 박기수가 수어장대를 증수하였는에, 그 형인 박주수가 쓴 것이다.
수어장대에서는 수어사가 수어청의 군사를 지휘하였는데, 정2품 상사에 해당하였다. 

수어청은 한양을 수비하는 5군영의 하나록 본래 한성부 북부 진장방에 그 본청이 있고 광주부윤을 부사로 삼아 남한산성을 관할케 하였다.

그러나 운영의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정조 19년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올기고,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괸리되어오다 2021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되었다.

또한, 수어장대는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일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군사 경관에 해당한다.
수어장대는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데, 그중 조선 숙종의 정비인 인정왕후의 아버지 김만기는「서장대기」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하였다.

'비록 한강의 호름을 가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이다'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의 청량산 정상에 성의 내외를 모두 굽어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에 위치하며, 남한산성의 축조 때부터 성내를 지휘하는 장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1751년(영조 27) 중층의 장대를 건축하고, 안에는 무망루, 밖에는 서장대라 편액 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836년(헌종 1) 개건된 것이며, 이 때 지금의 ‘수어장대’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
건축적 특징은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상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구성된 중층 건물로 하층 실내 공간의 기둥 내부는 장마루를 깔고 판벽과 평난간으로 구획한 공간으로 꾸미고, 그 둘레의 퇴칸부는 방전을 깐 바닥공간으로 하여 두 영역을 나누었으며, 상층의 실내 공간은 전체를 장마루를 깔고 사방으로 널판문을 달았다.
이와 같이 중심부와 주변부를 정확히 구분하여 구조와 실내공간을 이에 맞춘 것은 기능을 우선하는 군사 건축적 성격을 보여준다. 한편, 세부 의장에 있어서는 초익공과 이익공의 구분 사용, 화반의 초각, 운공의 사용, 팔각의 장초석, 지붕마루의 양성과 용두, 모로 단청, 큰 글씨로 써진 편액 등에서 권위 건축에 어울리는 격식과 위엄을 잘 보여준다.
이에 더하여,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내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에 있는 최대 규모의 장대로서 19세기 중건 이래 원형을 잘 유지해오고 있다. 또한 이 장소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물론이고, 이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 역대의 국왕이 남한산성을 찾을 때 반드시 올라서 옛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였던 곳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에 국가지정유산(보물)으로 지정하여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보물 남한산성 수어장대 (南漢山城 守禦將臺) | 국가유산포털 | 국가유산 검색

 

보물 남한산성 수어장대 (南漢山城 守禦將臺) : 국가유산포털 - 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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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守禦將臺)는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시설이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서·남·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는 장대로 산성 내의 최고봉인 일장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성 내부와 인근의 양주·양평·용인·고양·서울·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전면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널마루를 설치하여 단조로운 난간을 둘렀다. 내부 천정에는 장반자를 귀틀 위에 깔아 단청으로 시문하였고 툇간 위의 반자는 연등천정이다. 내진과 외진 사이 바닥에는 전을 깔고 한쪽에 계단을 설치하여 2층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2층은 1층과 달리 변주에 판문을 달아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 있고,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수어장대의 목부에는 모로단청을 시문하여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수어장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어장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시설이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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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장대 (守禦將臺)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조선후기에 건립된 팔작지붕의 건물. 장대 · 성곽시설.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건물. 2021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1층 105.08㎡, 2층 43.29㎡이다. 아래층 평면은 내진(內陣) 3×2칸과 외진(外陣) 5×4칸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 위에 한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였으며, 맨 바깥둘레에는 8모뿔대 주춧돌을 높게 세우고 안두리기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 주춧돌을 받쳤다. 외진부에는 전돌을 깔았고, 내진부에는 긴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모두 민흘림 둥근기둥이다.
공포는 익공계인데 1층은 초익공, 2층은 2익공으로 되어 있으며, 첨차 끝은 모두 수서[垂舌]이다. 2층 평방 위에만 화반(花盤: 주심도리 밑 장혀를 초새김한 받침)과 운공(雲工: 화반 상부에 얹혀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물건)을 사용하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로서 고주(高柱) 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마루보를 받쳤다. 마루보 위에는 판대공(板臺工)을 세우고 그 위에 마루도리를 걸었다.
합각벽(閤閣壁)은 전벽돌쌓기로 되어 있고, 용마루 · 합각마루 및 1층 추녀마루에 용두(龍頭)를 얹었으며, 사래[蛇羅: 추녀 끝에 잇대어 댄 네모난 서까래] 끝에는 토수(吐首: 용머리와 鬼頭 모양의 장식)를 끼웠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바름을 하였고, 기와골 끝에는 막새를 사용하였다. 창호(窓戶)는 위층에만 있으며 매칸마다 2짝 판문(板門)을 달았다.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아래층 내진의 북동쪽 칸에 설치되어 있으며 단청은 모로단청이다.
외부 정면에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쓴 현판이 있으며, 무망루(無忘樓)’라고 쓴 현판은 수어장대 내부에 있었던 것을 보호각을 새로 지어 그곳에서 보호관리 하면서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수어장대(守禦將臺)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어장대(守禦將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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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망루(無忘樓)

조선 영조 27년 (1751) 팡주유수 이기진(廣州留守 李箕鎮)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內便) 문루로서 고 편액 (扁額)
이 2층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 (懸板)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수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溶陽)에 (北伐)을 피하다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수어장대(守禦將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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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당 (淸涼堂)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조선후기 남한산성 축성자 이회와 그의 처첩을 모신 사당.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妻妾)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이회(李晦)는 1624년(인조 2)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築城)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았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를 받고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 송씨와 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 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무죄가 밝혀져 서장대(西將臺) 옆에 사당을 지어 넋을 달래게 하였다.
본당(本堂)의 전면에는 이회의 초상화가 있고 좌 · 우편에는 벽암대사(碧岩大師)와 이회 처첩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 것은 6·25전쟁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이후 새로 만든 것이다. 예로부터 정월 초이튿날에 제를 올리는데, 그날이면 성 안팎의 부녀자들이 소원성취의 치성을 드리는 풍습이 전한다.
사당은 굴도리를 얹었으며 연등천장에 5량가(五樑架)이다. 대문은 납도리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이다. 중앙 칸은 대문이고 동쪽 칸은 허청(虛廳: 헛간으로 된 집채)으로 협문이 달려 있다. 서쪽 칸은 제기고(祭器庫)이다.

청량당(淸涼堂)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량당(淸涼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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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당(淸凉堂)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2번지이다.
이회(李晦)와 그의 처첩(妻妾), 벽암대사(碧岩大師)를 모신 사당(祠堂)으로 이회(李晦)는 조선(朝鮮) 인조(仁祖) 2년(1624) 남한산성(南漢山城) 축성(築城) 때에 동남쪽의 축성공사를 맡아 하였으나 축성 경비를 탕진하고 공사에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마치지 못하였다는 무고한 모략을 받고 무참히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처첩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삼남지방(三南地方)에서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 후 그가 이룬 공사를 재조사해보니 다른 성벽에 비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어 있어 그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서장대(西將臺) 옆에 사당(祠堂)을 지어 그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
본당(本堂)의 전면에는 이회(李晦)의 초상화(肖像畵)가 있고 좌우편에는 벽암대사(碧岩大師)와 이회(李晦) 처첩(妻妾)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 것은 6·25사변 때 분실되고 지금 있는 것은 그 후 새로 만든 것이다.
청량당은 정면3칸, 측면 2칸이다. 주칸(柱間)은 정면 양협칸과 측면 두칸은 같이 잡았고, 정면어칸만은 반자정도 넓게 잡았다. 기단은 장대석 외벌대이고 기단바닥은 흙바닥이다. 정면초석은 화강석 방형초석이지만 상면을 평활하게 다듬었을 뿐이고 측면은 배면의 초석은 자연석 덤벙주초이다. 기둥은 각주이고 내부는 전칸(全間)이 우물마루이다. 민도리집이지만 건물내부에 주두와 소로를 사용하였다. 가구(架構)는 5량가(樑架)인데 정,배면 평주위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사분변작한 위치에 동자주 없이 주두만을 놓고 종량을 걸었다. 종량 위에는 판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걸었다. 도리는 모두 굴도리이다. 측면 중앙기둥 위에서는 대들보 위로 층량을 걸었다.
처마는 사면 모두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합각벽은 전벽돌쌓기로 되어 있다. 창호(窓戶)는 정면어칸에만 출입문을 설치하고 양협칸에는 창문을 설치하였다. 출입문은 궁판달린 네짝 띠살문이며, 창은 이중창인데 외부는 띠살창이고 내부는 아자창이다. 내부 배면과 측면의 각 칸에는 벽감을 설치하고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 벽감외부에는 두짝 띠살문을 달았으며 띠살문 하부에는 머름을 설치하였다. 우측면의 정면쪽 협칸만은 벽감없이 벽면에 초상화를 걸었다.

문화유산 청량당

 

청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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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당(淸凉堂)은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 내에 있는 조선시대 이회와 그의 부인 송씨(宋氏),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청량당은 이회와 그의 부인 송씨(宋氏),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모시고 있는 초상화는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훗날 새로 그린 것이다.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의 공사를 맡았던 이회는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게 되자 공사비를 탕진하고 공사에도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끝내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부인(송씨)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여 오던 중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에 빠져 자살하였다.
그 뒤에 이회가 쌓은 남쪽 성벽이 다른 성벽보다도 더 튼튼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의 무죄가 밝혀지자 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안쪽 정면에 이회의 영정(초상화)가 있고 그 양옆으로 처첩(부인과 소실)과 벽암대사의 영정이 있다.

청량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청량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청량당(淸凉堂)은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 내에 있는 조선시대 이회와 그의 부인 송씨(宋氏),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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