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1902~1920 독립 운동가)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리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 유관순 역사의 마지막 유언 -
유관순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주소: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생가길 18-2)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3남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인 유 열사는 3월 1일 파고다 공원,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독립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내려온 열사는 어른들과 독립만세운동을 협의하며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때 유 열사의 부모를 포함 19명이 순국하였고 30여명이 부상 당하였다.
일본 헌병대에 주모자로 체포된 유 열사는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어도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1920년 9월 28일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그토록 목마르게 기다리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 열사의 시신을 인도하여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거행한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표석도 없이 안장되었다.
경성부가 이 곳을 1935년부터 1936년 4월까지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징할 때 유 열사 묘를 포함한 연고자기 없는 28,000여 분묘를 화장하여 이 곳에 합장하고 위령비를 세웠다.
오늘 이 곳에 3 1 독립운동의 상징인 민족의 딸 유관순 열사 분묘합장 표지비를 세운다.
2018년 09월 07일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
앞: 이태원묘지 무연분묘합장비
뒤 : 1936년 12월 경성부
경성부는 1933년 경기도 구리면 망우리에 공동묘지를 개설하고 부내의 공동묘지를 순차적으로 없앴다.
이태원공동묘지는 1935년부터 미아리와 망우리로 이장이 개시되어 1936년 4월 8일에 완료되었는데, 경성부 위생과는 무연고 묘로 판명된 28,000여기를 화장하여 망우리공동묘지에 합장 후 이 위령비를 세웠다.
한편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여 일제의 삼업한 경비 하에 이태원공동묘지에 매장되어 묘비도 없이 지내다가 이태원묘지가 없어지면서 아무도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하니, 이 합장비는 유관순 열사를 가장 가깝게 추모할 수 있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정부는 유관순 열사에게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다시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승격 추서하였다.
노고산천골취장비
1938년 서울 서쪽 노고산(서강대 뒤)에 있던 공동묘지가 택지개발로 없어지면서 무연고 분묘를 망우리로 옮기고 세운 비석이다.
세로로 새겨진 글자 '경서노고신천골취장비'는 당대 최고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이 썼으며 아래에 붙은 비면의 글은 노고산장택지경영 주식회사 전무인 송달섭이 짓고 서예가 김흡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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