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묘, 王에서 君이 된 폐주의 쓸쓸한 묘
도봉구 방학동은 중랑천을 경계로 상계동과 이웃하고 창동, 쌍문동과 맞닿은 동네이다. 방학동도 서울의 여느 동네와 마찬가지로 아파트촌이 발달되어 있다. 이곳 원당샘공원 옆에 바로 연산군 묘가 있다. 연산군 묘역에는 총 5개의 봉분이 있다.
연산군 묘역의 5개의 봉분 중 4기는 연산군과 관계 있으나 하나는 전혀 연산군과 관련이 없다. 묘역 맨 위 두 기는 연산군과 부인 거창군부인 신 씨의 묘로 쌍봉이다. 그 아래에 연산군과 관련 없는 의정궁주 조 씨의 묘가 있고 그 아래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부마 능양위 구문경 부부의 묘가 있다. 의정궁주 조 씨는 태종의 후궁이다. 1454년, 태종이 말년에 외로워 후궁을 간택했다. 이때 조 씨가 간택되었는데 가례를 올리기 전에 태종이 승하했다. 하지만 이미 왕의 여자이기에 궁에서 살다 죽어 세종대왕의 4째 아들 임영대군의 사패지인 이곳에 묘를 썼다. 연산군의 이름은 이융, 성종과 폐비 윤 씨 사이에서 1476년에 태어났다. 세자 시절 글씨를 잘 쓰고 시도 잘 지어 성종이 총애했다. 1494년에 왕이 되었다. 하지만 폭정과 사화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1506년 반정으로 폐위당하고 이복동생 중종이 왕위를 이었다. 연산군은 강화로 유배되고 두 달 후, 31세에 생을 마감했다. 묘는 유배지인 강화 교동에 마련했다. 1512년, 연산군 부인 신 씨가 묘 이장을 요청하여, 다음해 중종이 이장을 허락했다. 왕자의 묘제에 따라 곡장, 혼유석, 장명등, 문석인, 재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재실 구성은 묘 관리인 참봉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재실에서 발견된 치제 현판에는 영조 때 연산군 외손에게 연산군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관청에서 제수를 주고 군사를 배치하여 묘를 지키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묘 뒤에 둘러싼 작은 담 곡장, 묘비 1쌍, 혼유석 1상, 봉분 좌우측에 세우는 망주석, 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힌다는 장명등 1쌍, 묘 주인을 보좌하는 인물상 문석인, 향로석, 재실을 갖추어져 있다. 비록 폐주이지만 대군의 예로 묘를 조성했다. 하지만 병풍석, 석마, 사초지 등은 세우지 않았다.
연산군이 유배될 때 왕비 신 씨는 같이 가겠다 했지만 중종은 허락치 않았다. 이후 연산군이 병이 들어 죽음이 가까워 오자 그는 ‘부인이 보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신 씨는 연산군이 폐위되고 오랫동안 홀로 지내다 1537년에 죽었다. 신 씨가 중종에게 남편의 이장을 청한 것은 임영대군이 아버지의 외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또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와 부마에 대한 사연도 있다. 부마 구문경의 아버지 구수영은 중종반정 공신. 그는 중종에게 아들의 이혼을 청하여 이혼하였으나 이 처사가 너무 가혹하다는 여론이 있어 2년 뒤에 재결합했다. 조선 시대 반정으로 폐위된 군주는 2명이다. 연산군과 광해군. 광해군은 그래도 몇 가지 업적이 있지만 연산군에게서 미덕은 사실 찾기 힘들다. 하지만 중종이 이복 형 연산군을 배려해 지금의 연산군 묘가 지속될 수 있었다. 혈통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왕조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연산군의 묘, 王에서 君이 된 폐주의 쓸쓸한 묘 - 매일경제 (mk.co.kr)
'서울둘레길 > 북한 도봉산 코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의공주 묘에서 쌍둥이 전망대까지 (0) | 2024.07.05 |
---|---|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그리고 사천 목씨 (0) | 2024.07.05 |
21 북한산 도봉코스 (0) | 2024.07.05 |
4 19 민주 묘지에서 왕실묘역길 시작점까지 (0) | 2024.07.05 |
이준 열사 묘역에서 4 19 민주 묘지까지 (0) | 2024.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