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독산성과 세마대지
- 지정 : 국가사적140호
- 위치 : 경기도 오산시 독산성로 일대(오산시 지곶동 155)
둘레 1,095m의 성이며, 2019년 발굴조사로 삼국시대 신라가 돌로 쌓은 석축산성 으로 새롭게 확인되었으며, 조선 전기, 임진왜란 때에는 토성으로 추정되며, 조선 선조 27년(1594년 임진왜란 중)에 경기도 관찰사 유근이 백성들과 함께 4일 만에 수축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년)에 방어사 변응성이 석성으로 수축하 였다. 정조 16년에는 약 70일간 신축에 가까운 대규모의 수축을 진행했고, 이후에 도 지속적으로 독산성에 대한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축성 기법은 성의 높이가 높지 않아 수직에 가까운 각도를 주어 축석되었다. 수구 2개, 우물 1개가 있다.
독산성에는 우리 민족의 독특한 축성 특징인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8개의 치(雉)가 있고, 성문은 동, 서, 남, 북 4개에 남문과 서문 사이에 암문이 있어 5개가 존재한다. 영조 때 편찬된『해동지도』「수원부」에 보면 성의 누각이 남문과 서문에 있었는데, 지금은 누각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문의 크기는 남문과 서문 순으로 크다. 우마가 지나다닐 정도이다. 따라서 주 출입문은 남문과 서문으로 추정된다.
독산성에는 독산대첩(세마대첩)의 승전을 기념해 지은 장대가 있는데, 그 유명한 권율의 세마대이다. 선조25년(1592년) 12월에 시작된 오산시 지역의 독산성전투는 관군과 의병이 긴밀하게 연계해 이룬 승첩으로 행주대첩이 있게 되는 밑거름이 된 전투였다.
1592년(선조25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한성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침략하였다. 5월 정암진전투, 7월 이치전투, 10월 진주대첩 등으로 왜군은 번번이 전투에 져 좌절되고, 해상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연전연패 하면서 호남과 해로를 통하여 한양에 진출한다는 본래의 계획이 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왜군은 한양으로 진격할 때 용인으로 거쳐 가면서, 오산(당시 수원)은 진격 당시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지만, 왜군의 거점이 용인지역인지라 항시 피습대상지역으로 오산(당시 수원)은 여러 번 약탈을 당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독산성을 중심으로 삼남지역의 근왕병이 주둔하거나 북상하는 주요한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전라순찰사였던 권율은 북상하여 1592년 12월에 독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였다. 한편 한성에 주둔하던 왜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권율이 호남에서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독산성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후방과의 연락 및 보급선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도성에 주둔한 왜군을 독산성으로 급파하였다.
왜군은 독산성 주위 3곳에 진을 치고 고립시킨 다음 공격하여 왔지만 권율은 매복과 기습전을 펼치며 성문을 닫고 지켜나갔다. 지형적인 조건을 자세하게 살핀 적장은 성안에는 물이 별로 없을 것이라 여기게 되었고, 부하에게 물 한 지게를 지어 산 위에 있는 권율에게 갖다 주게 하였다. 사실 독산성엔 물이 부족하여 극심한 식수난을 겪고 있었다. 권율은 즉시 성 아래의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올라가 흰 쌀을 말위로 쏟아 붓게 하였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본 적장의 눈에는 물이 넘치는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독산성에서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차에, 남부지방에서 모여든 의병들이 왜군의 후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자 조급해진 왜병들은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한양으로 퇴각하기에 이른다. 왜군은 5일간 독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과천을 거쳐 한양으로 퇴각하는데,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는데 봉담면의 삼천병마골전투는 이때의 전승지인 것이다.
권율은 1593년 1월 중순까지 독산성에 머물다 행주산성으로 이동했다. 그 후 권율은 1593년(선조 26년) 2월 12일 하루 만에 행주대첩에서도 이겨 서울을 다시 찾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 독산성 전투가 밑받침이 되어 행주산성에서 하루 만에 왜적을 섬멸하게 된 것이다.
이 독산성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여 선조의 명령에 따라 장대가 건립됐고, 세마대(洗馬臺)라 불리게 됐다. 몇 번의 중수를 거치고, 그 후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의 파괴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을, ‘세마대재건촉진대’를 조직한 당시 서랑리를 비롯한 인근 주민의 염원과 노력으로 1957년 8월 15일 세마대를 본래의 터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세마대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휘호이다. 오산을 가장 오산답게 알려주는 큰 역할을 한 것이 이 권율의 세마대첩이다. 독산성 존재의 큰 의미이자, 오산시민의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오산시 문화유산(문화재 현황) - 오산독산성과 세마대지 (os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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