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락산 전설
모락산 정상에는 한성기 백제시대에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했던 산성터가 남아있다. 모락산이란 지명은 임영대군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자 임영대군은 이곳으로 피신해 살았는데, 산 아래 초막을 짓고 매일 높은 봉우리 큰 바위에 올라 망궐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한양을 그리워하고 조선을 걱정하던 임영대군을 기리며 모락산이라 하고, 그 바위를 사인암이라 이름지었다.
갈미한글공원
갈미한글공원은 의왕시 청계동 양지편에서 태어난 한글학자 이희승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한글 조형물을 설치하고 시민들의 쉼터로 손끝에 조성한 공원이다. 주변에는 6.25 당시 모락산 전투에서 전사한 한국군의 넋을 위로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조성된 평화의 쉼터가 있다. 갈미는 조선시대에 갈산이라고도 한 데서 유래된 지명으로, 갈뫼라 했다가 갈미로 굳어졌다.
임영대군묘와 능안마을
임영대군은 세종과 소현왕후 사이에 태어난 넷째아들이다. 이름은 구(1420~1469) 이고 시호는 정간이며, 그의 묘와 사당이 능안마을에 있다. 임영대군의 묘가 이곳에 위치하게 된 연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425년 소헌왕후가 청계사 서쪽에 있는 원통암을 왕실 원찰로 삼고 중창한 뒤 영웅대군과 함께 왕래하면서 인연을 맺은 듯하다. 수양대군을 피해 이곳 모락산 기슭에 내려와 숨어 지냈다고 전한다. 사람 들은 이 마을이 임금의 능 후보지였다 하여 '능안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매기마을과 용머리
오매기는 조선시대부터 원래 문화 유씨를 중심으로 문씨, 진씨, 노씨, 마 씨 등이 각각 마음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섯집매말을 뜻하는'오막동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백운산과 모락산에서 흘러내려 마을 앞을 지나는 오전천의 물길이 모락산 줄기 끝자락 바위를 만나 휘돌아 흐르는 곳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곳 마을을 가리켜 마치 용의 머리와 같은 곳에 위치해 있다 하여 용머리라고 부른다.
전주남이마을과 삼형제바위 전설
조선 중엽 '전주남'이란 욕심 많은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다.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시주를 청하고자 그 부잣집에 들렀다. 전주남이는 시주는 커녕 거름을 담아주며 문전박대했고, 반면 며느리는 몰래 따라와 사주를 했다. 스님은 전주남이를 괘씸하게 여겨 골탕을 먹이고자 마을 뒷산의 혈을 끊으면 더 큰 부자가 된다고 일러주고, 며느리에게는 "훗날 큰비가 내리면 아이들을 데리고 뒷산으로 피하시오. 단 절대 뒤를 들아 보지 마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어느날 마을에 홍수가 났다. 전주남이는 끝내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집에 남았고, 며느리는 어쩔 수 없이 아들 셋만을 앞세우고 뒷산으로 올랐다. 때마침 마을에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깜짝 놀란 며느리와 아이들 삼형제는 스님이 일러준 말을 잊고 그만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들은 모두 돌이 되어 버렸다.
보식골 거북바위
보식골은 성라자로마을과 모락초등학교가 있는 지역으로 큰 보식골과 작은 보식골로 나뉜다. 거북바위는 모락초등학교 옆을 지나는 모락산들레길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 산으로 기어오르는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다. 성라자로마을 아래는 조선시대에 원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원골이라고 한다. 모락산에서 흘러내려 원골을 지나는 개울은 원동천이라고 하는데, 정조 임금의 현릉원 행차 때 어가가 잠시 머물렀다 하여 '어냇길'이라고도 하고 그 주변 들판을 '어내들'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