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과 율곡이이의 생가 강릉 오죽헌
오죽헌은 역사적 인물인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생가로 조선 중종 때 건축되었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뒤뜰에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 오죽헌이라 이름 붙여졌으며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건축학적인 측면에서도 가치 있는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이며, 왼쪽 2칸은 대청이며 오른쪽 1칸에 온돌방을 들였다.
사임당이 화폐 도안 인물로 선정되면서부터는 '세계 최초 모자 화폐인물 탄생지'라는 수식어가 붙은 대표 유적지다. 건축사적인 면에서 중요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몽룡실에서 율곡이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경내의 문성사는 율곡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율곡의 저서와 유년기에 사용했던 벼루(용연)을 보관하기 위한 유품소장각이 있다. 율곡기념관은 신사임당의 유작을 비롯하여 일가의 유품전시관이 있다. 강릉시는 1961년부터 매년 10월 25,26일 율곡을 추모하는 율곡제전을 봉행하고 있다.
- 위치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율곡로3139번길 24 오죽헌
- 문의 - 033-660-3308
- 시간 - 매일: 09:00 – 18:00 / 매표시간: 09:00 - 17:00
- 스탬프 - 오죽헌 관광안내소
- 관람료 - 성인 3,000원 / 청소년,군인 2,000원 / 어린이 1,000원
- 홈페이지 - http://www.gn.go.kr/museum/index.do
오죽헌·시립박물관
Gangneung Money Museum 강릉화폐전시관 세계 최초 모자의 이야기와 함께 화폐의 역사와 가치를 만날 수 있는 강릉화폐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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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방법 - 강릉고속버스터미널 하차 후 일반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 강릉시외.고속터미널 정류장에서 302번 버스 승차 → 오죽헌 정류장 하차 → 도보 8분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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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의 절경을 품은 사찰 속초 신흥사 신흥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자장이 창건한 사찰로 조선 인조 때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당시 세 명의 스님에게 백발 신인이 나타나 “이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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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득사의(見得思義)
얻을 것이 생기면 옳은지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나에게 이득이 있을 일을 만나면 먼저 옳은 일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見 : 볼 견
得 : 얻을 득
思 : 생각 사
義 : 옳을 의
孔子曰: 君子有九思.
공자왈: 군자유구사.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시사명, 청사총, 색사온, 모사공, 언사충, 사사경, 의사문, 분사난, 견득사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에게는 생각하는 일이 아홉 가지 있다. 사물을 볼 때는 분명하게 볼 것을 생각하고, 소리를 들을 때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안색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 말은 충실할 것을 생각하고, 일할 때는 신중할 것을 생각하고, 의심이 날 때는 물을 것을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화를 낸 뒤에 어렵게 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을 보게 되면 의로운 것인지를 생각한다.”
춘추시대의 노(魯)나라에도 부정과 비리가 뿌리 깊었다. 흉년이 들어 세수(稅收) 부족이 예상되자 노나라 애공(哀公)은 다른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증세(增稅) 타령을 했다.(논어 안연편 9장)
공자 제자 염구(冉求)마저도 노나라의 실력자 계손씨(季孫氏) 가문에서 일할 때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 들여 계손씨가 재산을 불리게 만들었다.(논어 선진편 17장)
공자의 제자 자화(子華)가 제(齊)나라로 사신을 떠나게 되었다. 염구는 자화의 어머니에게 곡식을 보내주자고 공자에게 요청을 했다. 염구는 공자가 말한 양보다 몇 배의 곡식을 자화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사실 자화는 살림살이가 넉넉한 형편이라 도움이 필요 없는 데도 동학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곡식을 보낸 것이다.(논어 옹야편 4장)
노나라 정공은 제나라가 여악(女樂), 즉 여성 가무악단을 보내자 고위 공직자들과 함께 연일 공연을 관람하느라 정사를 내팽개쳤다. 오늘날 말로 하면 국정 최고 책임자가 경쟁국의 미인계에 놀아나 본분을 잃어버린 처사이다.공자는 노나라의 위정자와 제자들 사이에 만연된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해 구사(九思)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어서 공자의 제자 자장(子張)의 말한다.
子張曰: 士, 見危致命, 見得思義, 祭思敬, 喪思哀, 其可已矣.
자장왈: 사, 견위치명, 견득사의, 제사경, 상사애, 기가이의.
자장이 말했다. “선비가 위험한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이득이 되는 것을 보면 그것을 가지는 것이 과연 의로운지 어떤지를 생각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자신의 태도가 공경스러운가를 생각하고, 상을 당했을 때는 자신의 마음이 애절한가를 생각한다면 괜찮게 되었다고 하겠다.”
제자가 스승에 이어서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이익 앞에 흔들리는 현상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익과 이득이 생기면 넙죽 받아먹을 것이 아니라 도의에 맞지 않으면 받지 말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자가 모든 이익을 부정적으로 보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늘날 식으로 공자가 반기업의 정서를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공자는 도의에 맞지 않은 부를 부정했을 뿐이다. 오히려 공자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가난한 삶을 부끄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조선 시대 아이들의 수신서라 할 수 있는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는 책이 있다. 격몽요결에는 선비가 되기 위한 처세훈인 구용구사(九容九思)가 있는데, 그 가운데 구사(九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사(九思)는 학문을 닦고 지혜를 더하기 위한 지표로서 생각을 함에 있어서 신중을 기하여 하라는 가르침이다.
시사명(視思明)은 사물이나 현상을 볼 때나 인식을 할 때는, 명확히 보아야 할 것을 생각하여, 판별하여 알아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청사총(廳思聰)은 남의 말이나 세상사를 들을 적에는 총명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의미로서 말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경청을 해야 함을 가르치는 말이다.
색사온(色思溫)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속에 들어 있는 것을 표현 할 때는, 온화하게 표현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가르침이다.
모사공(貌思恭)은 용모는 단정히 하여야 하며, 행함은 공손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함을 가르치는 말이다.
언사충(言思忠)은 말을 할 때는 진실하고, 실천 가능한 말만 하겠다는 것과 충성된 말인지를 생각을 하면서, 말을 하라는 가르침이다.
사사경(事思敬)은 일을 할 때에는 신중하고, 성실하게 완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이다.
의사문(疑思問)은 의문이나 의심이 나는 일이 있을 때, 언제든지 문의를 할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는 말이다.
분염사난(忿思難)은 화가 났을 때나, 분한 일이 있을 때, 더 큰 어려움이 있거나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나 않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견득사의(見得思義)는 이득이 생기는 일이 있을 때, 나에게 오는 득(得)이 의로운 것인가 또는 옳지 않는 지를 생각 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견득사의(見得思義)
견득사의(見得思義) 얻을 것이 생기면 옳은지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나에게 이득이 있을 일을 만나면 먼저 옳은 일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見 : 볼 견得 : 얻을 득思 : 생각 사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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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초중도 화단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고 현숙한 여성 중 한 분으로 존경받고 있는 사임당은 시, 글씨. 그림, 자수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림으로는 산수와 포도를 잘 그렸으며, 플과 벌레 역시 잘 그렸다.
특히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에서는 자연을 허투루 보지 않았던 사임당의 심성과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해 내는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그림을 본 숙종대왕은 '오직 풀이요 벌레거늘 모습이 아주 비슷하구나. 부인이 묘사한 것이 어찌 이처럼 오묘한고.' 라는 시를 지었고, 권상하는 '실물과 똑같아 줄기와 잎사귀는 이슬을 머금은 것 같고 풀벌레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며 감탄한 정도였다.
오죽헌 • 시립박물관에서는 초충도의 주요 소재인 오이, 수박, 가지, 맨드라미, 양귀비, 봉선화, 원추리 등을 심어 화단을 조성하였다.
식물들 주위로 벌 • 나비 잠자리 • 여치 방아깨비 • 쇠똥구리와 같은 날벌레와 길벌레가 모여들면 마치 한 폭의 초충도를 보는 듯하여, 화단의 풍경과 그림을 직접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구용정
구용정은 율곡의 저서 『격몽요결 』의 「지신장」에 나오는 학문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아홉 가지 몸가짐, 즉 '구용'에서 따온 이름이다. 「격몽요결』은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하여 율곡이 42세에 쓴 책이다. 마음을 세우는 일, 몸소 실천할 일, 부모 섬기는 법, 남을 대하는 방법 등 학문하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 입지장 - 뜻을 세움, 혁구습장부품 - 낡고 나쁜 습관을 고침, 지신장 후 - 배우는 사람의 자세, 독서장 - 글을 읽는 방법, 사친장 - 부모를 섬기는 일, 상제장 - 장레의 절차와 법도, 제례장 - 제사의 절차와 예절, 거가장 - 가정생활에 관한 글, 접인장 - 대인관계에 대한 예절, 처세장 - 처세에 관한 지침 등 전체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용 - 학문을 배우기 위한 아홉 가지 몸과 마음가짐
- 족용중 - 발은 무겁게 놀려야 한다.
- 수용공 - 손은 공손히 놀려야 한다.
- 목용단 - 눈은 단정하게 떠야 한다.
- 구용지 - 입은 다물고 있어야 한다.
- 성용정 - 목소리는 조용하게 내야 한다.
- 두용직 - 머리는 곧게 가져야 한다.
- 기용숙 - 기운은 엄숙하게 가져야 한다.
- 입용덕 - 서 있을 때는 덕이 있게 해야 한다.
- 색용장 - 얼굴빛은 씩씩하게 가져야 한다.




자경문
자경문은 오죽헌의 안팎을 가르는 문이다. 율곡은 어머니를 여읜 후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유학에 뜻을 두고 일 년 만에 돌아왔다. 그때 강릉 외가로 와 외할머니 앞에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이라는 의미의 <자경문> 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문은 '강릉 임영관 삼문 (국보 제51호)'과 같은 모양으로 1976년4월에 건립되었다.
자경문
- 입지 - 성인이 되고자 쉼 없이 노력한다.
- 과언 - 마음을 정하는 데는 먼저 말을 적게 한다.
- 정심 - 놓아버린 마음을 거두어들여 바르게 한다.
- 근독 - 매사에 공손하며 삼가고 조심한다.
- 독서 - 독서, 공부에는 생각이 앞서야 한다.
- 금욕 - 재산과 명예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 진성 - 해애할 일이라먄 정성을 다한다.
- 수면 - 때가 아닌 잠을 자는 것을 경계한다.
- 용공 - 수양과 공부는 서두르지 않고 계속한다.



문성사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8월 인조대왕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 (道德博聞 安民立政)'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율곡 선생이 쓴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하기 위해 건축된 어제각이 있었으나 사랑채 북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문성사를 건립하여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것으로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되었다.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다.
현판 글씨 ‘문성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문성사 - 오죽헌·시립박물관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 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8월 인조대왕이 율곡 선생에게 내린 시호로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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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 배롱나무
강릉시의 시화로 꽃피는 기간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으로 나이가 600살이 넘는다. 신사임당과 율곡 모자가 어루만졌을 이 배롱나무는 율곡송과 함께 오늘날 오죽헌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강릉 오죽헌 江陵 烏竹軒
보물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53-1584)가 태어난 조선 전기의 사대부 가옥이다.
오죽헌에는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몽롱실이 있는데, 율곡을 낳기 전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해서 붙여졌다. 이로 인해 율곡의 아명이 '현룡'이다.
오죽헌은 최치운(1390~140)이 처음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의 아들 최응현(1428-1507)에서 딸과 사위에게로 상속되어 오다가 율곡의 외조모 용인 이씨가 남편 신명화(47-152) 사후 외손인 권처균(541~162) 에게 물려주었다. 권처균은 가옥 뒤뜰에 오죽이 자라고 있어 당호를 '오죽헌'이라 하였다.
오죽헌 옆에는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는 천연기념물 '오죽헌 율곡매'가 있으며, 경내의 어제각은 율곡의 격몽요결과 벼루를 보관한 곳으로 정조 임금이 율곡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글을 지어 하사하고 세운 건물이다. 또한 율곡의 영정을 봉안한 문성사, 강릉시립박물관, 율곡기념관, 강릉화폐전시관, 율곡인성교육관, 야외전시장 등에 다양한 문화유산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오죽헌은 한국 전통 고택의 백미로 꼽히는 유서 깊은 국가유산이자 강릉을 대표하는 역사문화 공간이다.


운한문
운 한문은 막돌담장으로 둘러싸인 어제각을 드나드는 출입문이다. 어제각과 함께 정조 12년(1788) 지금의 문성사 앞에 건립되었다가, 1987년 이 자리로 옮겨와 복원되었다.
정조대왕이 율곡의 「격몽요결 꽃보』과 벼루를 궁으로 가지고 오게 하여 직접 본 후 잘 보관 하라며 돌려보내자, 당시 강원도관찰사 김재찬, 강릉부사 맹지대가 어명을 받들어 어제각을 지었다.
'운한'은 은하수를 뜻하며 「시경』의 대아편에 나오는 "탁피운한 위장우천(밝은 저 은하수, 하늘에 둘러 있구나"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정조대왕의 덕을 칭송하는 의미로 쓰였다.
운한문의 글씨는 어제각을 건립할 당시 썼을 것으로 보이나 작자는 알 수 없다. '문'자는 중국 송대 왕희지의 초서체를 본받아 쓴 글씨이다.


어제각 御製閣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었다.
1788년 정조 임금은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들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보았다. 그리고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지어 새기게 하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붙여 잘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 어제각이다





율곡 이이
이이(1536~1584)는 조선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 호는 율곡 • 석담 • 우재이다. 아버지는 이원수(1501~1561), 어머니는 신사임당(1504~1551)으로, 1536년 음력 12월 26일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났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짓고, 10세 때에 강릉 경포대에 올라 「경포대부」를 지을 정도로 학문적 재능이 뛰어나 1548년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작고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했다. 20세 때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오죽헌에 돌아와 유교적 수양론을 담은 「자경문」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1557년 성주목사 노경린(1516~1568) 딸과 혼인하였다. 1558년 예안의 도산으로 이황(1501~1570)을 찾아가 강론하였고, 그해 겨울 별시(문과 초시)에서 「천도책」을 지어 장원하는 등 13세 이후 여러 차례 과거에서 장원하여 학문적 출중함을 드러냈다. 1561년 아버지 이원수가 작고하였다.
1564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68년 천추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69년에는 임금에게 왕도정치의 실천 방안을 담은『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4년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지진 등의 재해가 잦자 당시 정치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만연봉사 」를 올렸다. 1575년에는 제왕학의 지침서인 「성학집요 」를 편찬하여 임금에게 바쳤다.
1577년 관직에서 물러나 해주로 낙향하여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1580년에는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를 저술했다. 이 무렵 해주 석담에 은병정사유를 건립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향약을 제정하여 지방자치제를 장려하고 사창제를 시행하여 빈민 구제에 힘쓰기도 했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 」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 」을 쓰고, 「학교모범 」 을 지었으며, 1583년 「시무육조 」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다시 이조판서와 판돈녕부사 등으로 임명되었다.
1584년 음력 1월 16일 한성부 대사동 자택 (현 서울 중로구 인사동 일대)에서 영면하여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24년 '문성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의 , 황주의 백록동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1682년 성혼(1535~1598)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자 조선을 개혁하고자 각종 사회제도 정비에 앞장선 탁월한 정치가였다. 평생 청빈을 잃지 않았고, 윤리성과 합리성까지 겸비한 최고의 지성인으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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