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인들, 터만 남은 혜음원의 모습을 시로 읊다
고향이 삼경*은 황폐하도록 버려두고
말을 타고 어디로 가나 해조차 지려는데
무성한 버들잎 살랑살랑 바람결에 흔들리고
날리던 송화가루 비에 젖어 누르구나
이규보, '혜음원에서 학사(學士) 임희수(林義叟)의 시에 차운하다'
「동국이상국전점東國李相國全集』 제10권 중
맙을 몰고 유유히 작은 시내 건너노니
저녁 볕 묵은 비에 풀만 어지럽구나
산마을의 사월에 행인은 적고
깊숙한 나무에는 누른 꾀꼬리 자유로이 우네
정포, '혜음원으로 가는 길에'
「동문선 東文選」 제21권 중
• 심경(三逕) : 비슬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사는 선비가 거처하는 곳
파루 혜음령 길은 어느 곳, 혜음원
고려시대의 혜음럼은 개경에서 납경(현재의 서울)으로 가는 길목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어깨가 스치고, 말은 굽이 서로 닿아서 항상 복잡하였지만 고갯길이 많고 길이 안전하지 못해 호랑이와 도적이 들끓고 죽는 자가 1년에 수벅 명에 달하였다고 합니다.
고러 예종의 신하 이소천은 왕에게 이곳에 원과 절을 지어 여행자를 보호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는 승려 해관과 응제, 민청 등의 도움으로 1122년 사찰과 원을 조성하였고, 이후 왕이 하루 밤 머무를 별원[행궁)을 새로 지으며 혜음원이 완성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혜음량 일대는 안전하게 되었으며, 혜음원은 이곳을 지나는 여행객들의 안식처가 되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고려 후기 몽골의 침입으로 불에 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르고 1999년, 혜음량 어느 깊은 산속에서 '혜음원'이 새겨진 기와 한 조각이 발견되었습니다. 800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려시대의 문화유산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전시실은 지금까지의 조사연구성과를 토대로 해음원의 탄생과 발굴 과정을 비롯하여 출토유물, 지리적 특징 등을 중심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수십 년 전 해음원지의 발견은 파주에 온 기적과 같은 선물이었습니다. 오늘의 시간을 통해 국내에서 유일한 고려 국립호텔 해음원이 가진 가치와 의미에 대하여 새롭게 주목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혜음원을 품은 마을, 용미리
광탄면 용미리는 호미리, 구룡리를 합한 곳으로 구룡九龍의 '룡龍 '자와 호미虎尾의 '미尾'자를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혜음원이 위치한 용미 4리에는 마을 뒷산 자락이 아홉 개로 갈라져 내려오며 어홉 마리의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고 붙여진 구룡마을, 영조 임금이 어머니 숙빈 최씨가 죽자 소령원으로 장례를 모시러 가는 길에 이르러 닭이 울었다는 달구니,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적과 싸우기 위해 진을 쳤던 곳인 진또배기 또는 진지동이라 불리는 세 개의 자연마을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진지동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조선을 도우러 왔던 명나라 이여송이 거느린 군대가 혜음령을 사이에 두고 왜군과 맞섰던 곳입니다.
이 마을에는 병사들이 진을 쳤을 때 적장의 목을 베어 매달 있다는 유래가 있는 솟대가 두 개 서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돌아 온 마을 사람들이 먹을 양식이 떨어져, 다른 마을의 재부를 마물로 물어 오라는 기원으로 장대 끝에 기러기 모양의 나무 조각을 깎아 서울 방향으로 세워 두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명나라 군대가 주둔해 있던 약 428년 전부터 유례했다고 알려진 솟대를 "진대'라고 부릅니다. 솟대는 마올 초입에 위치한 할아버지 솟대('진대할아버지')와 마을 초입에서 용미 초등학교 쪽으로 200m를 더 들어가 진지동 교화 건너편에 할미니 숫대('진대할머니') 한 쌍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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