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성대
낙성대(落星垈)는 강감찬이 태어난 곳으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에 위치해 있다. 낙성대는 그가 태어날 때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강감찬(姜邯贊, 948∼1031) 이 태어난 낙성대를 보존하고, 강감찬을 기리기 위해 조성하였는데 1973년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 6월 10일에 공원 조성이 완료되었다. 면적은 3만 1,350m2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출생지에 큰 별이 떨어졌다는 의미로 낙성대라고 이름이 붙여졌다.[1] 조선 초기의 문신인 성현(成俔, 1439~1504)이 쓴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조그마했다고 전하면서 강감찬의 관상은 귀인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는 송나라 사신과 관련하여 전하길, 어느 날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강감찬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사신은 한눈에 강감찬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송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으니, 필연코 가난한 선비다.” 하고, 강감찬을 보고는 두 팔을 벌리고 엎드려 절하며, “문곡성이 오랫동안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東方)에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기록이다.
《고려사》는 강감찬을 가리켜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고, 《용재총화》는 염정성의 화신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구전되는 설화이라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일화에 등장하는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운(文運)을 주관하고 5번째 별인 염정성은 형살(刑殺)을 주관한다는데 북두칠성은 국자 모양의 맨 앞별에서부터 차례로 탐랑성∙거문성∙녹존성∙문곡성∙염정성∙무곡성∙파군성으로 붙여져 있다.
강감찬이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신이면서도 거란을 물리친 무장의 재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문곡성∙염정성이 등장한 것같다. 중국에서는 문곡성의 화신을 판관 포청천으로 봤고 문곡성이 중국에서 고려로 건너왔으니 송나라의 사신이 큰 절을 올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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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강감찬 장군 사적비
한국 민족의 역사상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고려일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이는 실로 강감찬 장군이시다. 그는 일찍 고려 정종 3년, 서기 948년에 금주, 지금 봉천동에서 태조의 건국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나니 때는 바야흐로 중원 대륙 동몽고 지대에 사나운 유목민들인 거란이 일어나 고려와 맞선 어려운 시대이었다. 거란군이 성종 12년, 서기 993년에 처음 침구해 왔을 때에는 재상 서희의 능란한 외교로써 물리쳤었고 그로부터 17년 뒤 현종 1년, 서기 1010년 겨울에 그들이 다시 4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칩입하므로 고려에서도 강조 장군이 30만 명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자 조정에서는 항복할 것을 의논했을 때 오직 예부시랑 강감찬이 왕을 피난케 하고 항전할 것을 역설하여 적을 물리치니 때에 그의 나이 64세였다. 그는 본시 문관 출신으로서, 학문과 지략이 탁월한 위에 문무를 겸비한 이라 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오다가, 현종 9년, 서기 1018년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에 재상을 겸한 채 서경유수가 되어 평안도로 내려가니, 압록강 동쪽 의주, 선천, 용천, 철산, 곽산, 귀성 등 여섯 고을의 성을 지키며 거란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거란 장수 소배압 10만 명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므로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가 되어, 안주로부터 의주까지에 20만 명을 풀어 진을 치고, 또 기병 1만2천 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다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동쪽 냇물을 가로막았다가, 적들이 오자 갑자기 물을 터서 적군을 크게 패했더니, 이듬해 정월, 적들은 또다시 다른 길로 송경 가까이 쳐들어 왔다가 쫓겨가며 귀성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때는 3월, 곳은 귀성의 동쪽 들판, 그날따라 풍우는 남쪽에서 몰아오고, 깃발은 바람결에 북쪽을 향하는지라, 장군은 기세를 타고 적군을 여지없이 무찌르니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사이 적들의 시체는 들을 덮었고, 말과 낙타와 갑주와 온갖 병기들조차 수없이 노획하니, 이야말로 고려일대를 통해 가장 이름난 승첩이었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우봉 영파역에 이르자, 왕은 비단 장막을 치고 풍악을 잡히며 개선장군을 환영하면서, 71세 노장군의 백발에 금꽃 여덟 가지를 꽂아주며, 왼손으로 손목을 잡고 바른손으로는 술잔을 권했으며, 함께 도성으로 들어오자, 국민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었고, 왕은 그에게 영광스런 공신호를 내려주었다. 장군은 73세에 조정에서 물러나 성 밖 동쪽 마을에 조용히 은거하며 낙도교거집과 구선집을 저술했으며, 현종 22년, 서기 1031년 8월에 세상을 여의니 84세요, 인헌이라 시호하고, 현종 묘정에 배향했었다. 그로부터 9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역사는 흘러갔건만, 민족의 영웅이 끼친 큰 공적이야 잊을 길이 없으므로, 여기 장군의 유적지에 사적비를 세워, 자손 만대에 전하여 우리 민족의 영광과 긍지를 삼으려 한다.
서기 1974년 6월 10일
노산 이은장 짓고
일중 김충현 쓰고
서울특별시장 양택식 세움
안국사
1973년~1974년에 걸쳐 409m의 담장을 쌓고, 영정을 모신 안국사(安國祠)를 지어 일대를 공원을 조성하였다. 안국사는 외삼문인 안국문을 거쳐, 내삼문 안에 건축되었는데, 사당 안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공원 면적은 31,350m²이고, 안국사의 면적은 237.6m²이다. 내부에는 강감찬 장군의 동상과 안국사 앞에는 원래 낙성대 터에 있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3층 석탑을 배치해 두었다. 이 탑은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탑의 높이는 4.48m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석탑의 위 층을 빼내어 탑의 높이를 한 층 낮추고, 탑안에 보물을 훔쳐갔다는 일화가 전하며, 탑 주위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도 모두 부수고,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을 끊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탑에 연유하여 옛날에는 주변 마을을 탑골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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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948년(정종 3)에 태어나 1031년(현종 22)에 사망했다. 1010년(현종 1) 요(遼)나라가 서경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했고, 1018년(현종 9) 요나라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상원수대장군으로서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 큰 승리 이후 요나라와 평화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된다.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교 관계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개설
본관은 금주(衿州). 초명은 강은천(姜殷川).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을 나주(羅州)로 피난시켜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 승지(承旨) ·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 중추원사(中樞院使) · 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
1018년(현종 9) 경관직(京官職)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外官職)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고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 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대장군(上元帥大將軍)이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이때의 구주대첩(龜州大捷)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安州)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현재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정예기병 1만 2000명을 산기슭에 잠복 ·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 현재 평안남도 자산)와 신은현(新恩縣: 현재 황해도 신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다. 특히 구주(龜州)에서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거란군은 애초 10만의 병력 가운데 고작 수천에 불과한 인원들만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의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강감찬을 극진히 환영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었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또한 강감찬은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해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현종 21)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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