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영남길

금학천따라

나들나들 2024. 10. 9. 11:51

금학천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관련항목 보기 부아산 북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경안천으로 흘러드는 하천. 

 

[개설] 금학천은 용인시 내 한복판을 흐르는 경안천의 지천으로 하천 연장은 5.1㎞, 유로 연장은 5.5㎞, 유역 면적은 14.3㎢, 몽리 면적은 5㏊이며, 호안은 6.2㎞의 하천이다. 발원지는 크게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북쪽의 멱조고개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세천이고 다른 하나는 남쪽의 부아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세천이다. 이 두 물줄기가 동광사 주변에서 합류, 동류하여 용인시 내 중앙을 관통하여 흐르다 경안천에 유입된다. 

 

[명칭유래] 1531년(중종 26)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용인현 산천조에는 금학천의 옛 이름이 금령천으로 나온다. 즉 “금령천은 금령역(金嶺驛) 남쪽에서 발원하여 양지현 소로동(所路洞)에서 북쪽으로 흘러 광주의 소내[牛川: 현 경안천]에 유입된다”라고 되어 있다. 『용인현읍지』「산천조」에는 “금령천이 현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양지 경계에서 발원한다”고 되어 있다. 이밖에 1760년(영조 36)의 『여지도서』, 1862년(철종 13)의 『대동지지』 등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99년에 발간된 『용인군지도읍지』「산천조」에도 “김량천은 현 남쪽 삼십리에 있다(金良川在縣南三十里)”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소이하다. 이것으로 보아 금령천이라는 명칭은 금령역명에서 유래했고, 금령천(金嶺川), 김(금)량천(金良川)이 혼용해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북동 관곡에 조선시대 양재도 찰방이 관할하던 금령역이 위치하여 역마 3필, 짐말 1필, 역졸 18명이 있었다. 금학천이라는 명칭은 옛 용인군청의 소재지로 김량장동 남구를 지칭하던 소학동(巢鶴洞)과 금령천(金嶺川)에서 각각 한자씩 따와서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1862년에 간행된 『대동지지』에도 “용인현 동쪽 30리에서 발원하여 양지 대해산의 각략동에서 북류하여 광주의 우내(현 경안천)로 유입된다(金嶺川東三十里源出陽智大海山之角略洞北流入廣州牛川)” 라고 적고 되어 있다. 

 

[자연환경] 금학천은 용인단층 구조선의 영향으로 석성산-멱조고개-부아산으로 이어지는 남북 능선의 동쪽 산록에 해당되는 지역에 집수 유역을 갖고 있는 하천이다. 멱조고개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지천과 부아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지천이 중촌 부근에서 합류하여 동류하여 용인시 내 한복판을 흘러서 경안천에 유입된다. 주요 교통로가 지형의 영향을 받아 하천을 따라 발달되었다. 지천을 따라서 개설된 군도 5호선을 따라 넘는 멱조고개는 옛 구성면 중리로 가는 길이다. 현재는 국도 42호선이 상하리 쪽으로 해서 크게 뚫렸다. 주변은 4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고동저 지형을 이루어 용인시 내 쪽은 고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금학천의 발원지가 되는 성산(城山) 산계는 법화산[395m]-성산[471m]-부아산[403m]-함봉산[107m]을 잇는 능선을 주골격으로 하는데 용인 지역에서 가장 넓게 중앙부를 점유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산세의 흐름이 나타난다. 주능선의 지맥들의 산세는 풍화에 약한 화강암 또는 규장편마암으로 구성되어 대체로 완만한 구릉지를 형성한다. 하천 유로망은 수지상이며 하천 연변에는 농경지가 분포되어 있다. 

 

[현황] 경안천의 지류로 상류 지역은 농업관개 용수로 큰 몫을 차지하나 역북동, 삼가동, 김량장동의 생활 폐수가 흘러들어 하류로 갈수록 오염이 심했으나 현재는 하수처리 시설의 확충으로 많이 정화되었다. 한 때 홍수 시에는 하천이 넘치는 일도 있었으나 하천 정비 사업과 치산치수로 홍수위가 조절되어 근년에는 넘치는 일이 없다. 금학천 주변에는 시가화가 넓게 전개되어 아파트, 우체국, 상공회의소, 동사무소 등이 있고, 특히 최상류 주변에는 용인대학교가 있다. 이밖에도 남북전기, 리나물류센터, 영진골프랜드테마파크와 동광사, 수덕사, 삼봉사, 금강사 등의 작은 절들이 있다. 용인중학교, 용인초등학교 앞쪽의 하천 가에는 대개 주차를 위한 하상 시멘트로 포장되었다가 2010년 현재는 생태하천으로 복원되고 시민들의 휴식공간과 자전거 도로를 설치하였다.
금학천 - 디지털용인문화대전 (grandculture.net)

 

금학천 - 디지털용인문화대전

[정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 부아산 북쪽 산록에서 발원하여 경안천으로 흘러드는 하천. [개설] 금학천은 용인시 내 한복판을 흐르는 경안천의 지천으로 하천 연장은 5.1㎞, 유로 연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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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길 수여선옛길

김량장동

과거와 현재를 이어가는 용인중앙시장

역사와 전통이 이어져가며 활성화되는 전통시장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김령역과 김령원이 존재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시장이 발달하여 처음에는 '김령장'으로 불리다가 되어 '김량장'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곳은 김량장리로 알려진 지역이었는데, 1914년에 행정구역 폐합으로 인해 용인군의 군청소재지가 되었으며, 1996년에 용인시로 , 승격되면서 김량장리도 김량동으로 승격되었습니다.

한 가지 일설에 따르면, 김량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시장을 개설하여 그의 이름을 따서 '김량장'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 영조 시대의 문헌인 『읍지」에는 김량장이라는 장시의 명칭이 등장하여 김량장의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현재는 용인중앙시장이 상설 장터로 형성되어 있으며, 매월 5, 10, 15, 20, 25, 30일에 5일장이 금학천변을 중심으로 열립니다.

이 지역의 전통시장은 2015년에 용인중앙시장 커뮤니티 카페 "머뭄'이 개설되어 전통시장의 새로운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김량장터 이익삼 의병 활동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133-1

김량장터 이익삼 의병 활동지는 이익삼 의병 부대를 비롯한 용인 지역 의병이 주로 활동했던 곳이다.

이익삼은 모현면 능원리 출신 의병장으로 1907년 8월부터 1909년 6월까지 용인·광주·죽산·양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익삼은 같은 지역 출신의 정기인 등과 함께 인근 지역 인물들을 규합하여 의병활동을 벌였는데, 이들의 주요 활동지가 김량장이었다. 1908년 4월 10일에 이익삼 의병은 동장 정한기를 위협하여 광목 4필과 짚신 20족을 빼앗아가는 등 주로 친일세력을 처단하거나 빈민을 구제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익삼은 한때 일제도 두려워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으나, 1909년 6월 2일 일제의 수원수비대 토벌대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김량장 학생 안세운동 기념 표석

김량시장 터

1919년 3월 24일 졸업식을 마친 김량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이곳 김량시장으로 진출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30명이 넘는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에 시장 상인과 주민들도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더 불어났다. 만세 시위는 결국 일본 헌병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학생들은 경찰서에 끌려가 큰 고초를 겪었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3월 28일 모현•포곡에서 옛 용인군청까지 진출한 만세 시위를 비롯해 3월 말 ~ 4월 초 잇따라 일어난 용인 지역 독립 만세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수여선 철길이 지나던 자리

이곳은 1930년부터 1972년까지 운행하였던 수여선 철길이 지나던 자리이다.

수여선은 일제의 수탈 정책에 따라 용인, 이천, 여주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쌀과 풍부한 임산물 등을 공출해 가기 위해 부설된 철도로 1930년 12월 1일에 수원- 용인 - 이천 사이 53.1km를 개통하였고,

1년 후인 1931년 12월 1일에 이천 - 여주 사이 20.3km를 개통 완료하였다. 수여선의 총 연장 거리는

73.4km였으며 레일 폭은 일반 열차의 절반정도인 76.2cm의 협궤로 증기 및 가솔린 병용 철도였다.

용인 관내를 통과한 철도의 길이는 약 30km였고 원천, 덕곡, 신갈, 어정, 삼가, 용인, 마평, 양지, 제일 역이 있었다. 수여선은 광복 후 교통부 철도국 소유로 국유화 되었고 여객 수송 및 화물운송의 교통수단으로 기능을 하였다. 이후 지속적인 도로의 확장으로 인한 자동차 교통의 발달과 철도 교통 수요가 급감하면서 적자 운행이 지속됨에 따라 1972년 3월 31일에 전 구간이 폐선 되었다. 수여선은 일제강점기에 수탈의 목적으로 부설된 아픈 역사의 산물인 동시에, 폐선 될 때까지 주요 교통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용인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함께하기도 하였다. 용인 지명 탄생 600년을 맞아 수여선 철길이 지나던 곳에 표지를 하여 지난 시절 용인과 함께 했던 수여선이 있었음을 기억하고자 한다.